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율리우스 카이사르/생애 (문단 편집) == 쇠락한 명가의 소년가장 == 카이사르는 기원전 100년, [[고대 로마|로마]] 공화국이 혼란하던 시절에 [[가이우스 율리우스 카이사르(기원전 91년 아시아 총독)|가이우스 율리우스 카이사르]]와 [[아우렐리아 코타]]의 아들로 태어났다. 카이사르가 10대일 때의 로마는 [[옵티마테스]]와 [[포풀라레스]]의 대립이 격화되던 시점이었다. 어린 시절 가정교사는 웅변가이자 문법학자인 마르쿠스 안토니우스 그니포였다. 그니포는 갈리아 출신이었다고 하는데, 로마 귀족들이 고용하는 가정교사는 모두 그리스인인게 당연하던 시절이었던 것을 감안하면 당시 카이사르 가문의 입지를 짐작할 수있다. 이 외에도 카이사르의 어린 시절 기록은 생각보다 적은데 이는 당대 쓰여진 카이사르 관련 역사책 중 어린 시절 부분이 죄다 소실되었기 때문이다. 수에토니우스의 기록에 따르면 카이사르는 15세의 어린 나이에 가장이 되고(기원전 85년) 16세에 유피테르(제우스)의 고위 사제 [[플라멘|플라멘 디알리스]](Flamen Dialis)'로 선출되었다(기원전 85년).[* 플라비우스의 기록에 따르면 이때 술라의 방해 공작이 있었지만 당선되었다고 쓰고 있지만 당시 로마는 고모부 마리우스와 훗날 장인이 되는 킨나 등 술라에 반대하던 마리우스 일파가 집권하던 상황이라 설득력이 부족하다. 실제로 당시에 킨나의 후원으로 최고사제에 당선됐다는 것이 정설이다.] 그리고 원래 [[기사계급]]의 코수티아라는 여성과 약혼을 깨고 당시 반 술라파의 수장이던 [[루키우스 코르넬리우스 킨나]]의 딸 [[코르넬리아 킨나]]와 결혼한다. 이때까지는 가문 좋고 성공가도를 달리는 평범한 로마 청소년의 일대기인데, 문제는 장인인 루키우스 킨나가 기원전 84년에 죽고 2년 뒤에 고모부와 장인과 대립하던 술라가 로마로 군대를 끌고 돌아와서 [[쿠데타]]를 일으켰다는 것이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